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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백수.. | 15/08/28 04:16 | 추천 38

국내 가요사의 비운의 천재 싱어송라이터 "유재하" 에 대해 알아보자(스압) +294 [42]

원문링크 https://www.ilbe.com/647371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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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못 올 지난날을 난 꾸밈없이 영원히 간직하리"

- 유재하 1집 "지난날" 中





청춘.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설레이는 단어이다.

노년에도 청춘이라고 외치는 정게할배들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청춘이란 20대 때가 아닐까 싶다.

온세상이 푸른 봄과 같은 그 황금 같은 시기.

그 청춘의 한 가운데에 있던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꽤나 오랫동안 불리우게 될 앨범 한장을 남겼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고.jpg




1987년 11월 1일 새벽.

그의 나이는 고작 26세, 청춘의 한 가운데에서 가장 빛날 나이에

그는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








유재하의 음악적 소양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비롯되었다.

60년대 일반 가정집에서 이미 전축과 LP 판을 들을 수 있는 환경 이었던

그의 집안 재력은, 그가 다양한 음악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유복한 환경에서 음악을 듣고 자란 유재하는 한양대 음대 작곡과를 들어간다.

전공은 클래식이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듣던 음악들의 영향인지 대중가요에도 관심이 많았고

그의 음악적 지향점은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조화 였다.



그가 처음 가요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키보드 연주자로서의 활동이었는데

그가 들어갔던 밴드는 가왕 "조용필" 의 "위대한 탄생" 이었다.



mem.jpg

(왼쪽 두번째가 유재하)



당시에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위대한 탄생 이란 밴드는 단순한

조용필 백밴드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실력을 가진

실력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세션계의 어벤저스 같은 팀이었다.

그리고 조용필은 80년대에 가요계 대표주자 였다.

그런 조용필에게 유재하는 자신이 작곡한 2곡을 전해줬고

조용필은 그 중 한곡을 자신의 7집 앨범에 수록한다.

아직까지도 사랑받는 유재하의 대표곡인 "사랑하기 때문에" 였다.





(조용필 버전과 유재하 버전. 개인적으론 유재하 버전이 좋긴 하다)




조용필이 자신의 곡을 불러줬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할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유재하는 달랐다. 자신이 원하는 느낌을 끌어내지 못했다고 느낀 그는

위대한 탄생에서 탈퇴한다.


이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군대에 입대 했고 제대 후,

그의 두번째 밴드인 "김현식" 의 "봄여름가을겨울" 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 팀에서도 앞선 상황과 비슷한 일이 생겼는데,

김현식이 3집 녹음을 위해 밴드 멤버들에게 각자 한 곡씩 가져오라고 한 것이다.



후에 "빛과소금" 이란 그룹으로 활동한 "장기호" 의 "그대와 단둘이서" 라는 곡이 나왔고,

현재까지 봄여름가을겨울 을 유지하고 있는 "김종진" 이 "쓸쓸한 오후" 라는 곡을 내놨다.


그리고 유재하는 무려 10곡이나 되는 곡을 가져왔는데,

그 중 단 한곡만이 선택받았다. 바로 "가리워진 길" 이다.





(위는 김현식 버전, 밑은 유재하 버전)




그 당시 같은 밴드였던 "전태관" 과 "김종진" 의 말에 따르면 유재하가 삐쳐서

팀을 나갔다고 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기분이 상한채로 팀에서 나간건 사실이다. 앨범 녹음중에 마무리도 짓지 않은 채 그냥 탈퇴해버렸으니.



그렇게 팀을 떠난 유재하는 드디어 누군가의 밴드가 아닌 본인 스스로의 이름으로 앨범을 녹음한다.

바로 유재하 1집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1집.jpg




이 앨범은 사실 발매당시에 대중들이나 평론가들에게도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음악이 기존 가요계에 존재하지 않던 곡들이라 생소하기도 했으며

그의 특출나지 않은 외모나 가창력등이 소히 말하는 스타 가 되기에는 좀 부족했었다.


그의 생전 유일한 방송출연 영상이자 5번 트랙에 수록된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함 들어보자.







지금 봐도 연예인 얼굴은 아닌듯...

당시 가요계에는 뽕끼 로 점철된 가요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락, 포크, 블루스 등 마이너 장르의 음악들이 오버 로 올라오던 시기였는데

유재하의 세련된 작,편곡이 가미된 팝발라드 곡들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빛을 보지 못한 것은 너무 일렀던 음악성도 아니었고

그의 외모도 아니었다.


그는 앨범이 나온지 3개월 만에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26세, 너무 젊었다.







그의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진 뒤, 음악에 대한 재평가가 나오기 시작했고,

다시는 신곡을 들을 수 없는 그의 데뷔작이자 유작이 되버린 앨범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 가슴속에 남아 많은 이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1. 유재하 집안의 재력에 대한 이야기로 "김광민" 과 "장기호" 의 증언이 있다.

유재하 아버지가 탄광 사업을 해서 준재벌에 가까웠고, 그의 집에 가보면 식기나

가구들이 온통 외제 였다고 한다.


2. 유재하의 대학시절, 수업과제로 플룻과 피아노 2중주를 작곡해 갔는데

곡이 너무 훌륭해서 교수가 '이건 니가 쓴게 아닐거다' 라며 의심했다고 한다.

평소 수업태도나 출석상황이 모범생은 아니었던 그였기에.


3. 조용필에게 가져간 곡 2곡 중 채택받지 못한 곡은 후에 본인의 1집 앨범에

수록 된 "우리들의 사랑" 이란 곡이었다. 가사가 살짝 수정되었다.


4. 조용필에게 준 곡이 10곡이라는 말도 있는데 그건 김현식에게 10곡을 주었던게

와전되서 그리 알려진것 같다. 당시 위대한탄생 리더였던 "송홍섭" 이 인터뷰한 내용상

두곡이 맞는 듯 하다. 직접 유재하의 집에가서 악보를 건내받았다고 한다.


5. 위대한탄생에서 탈퇴한 이유에는 당시 클래식계의 부심도 어느정도 영향이 있다고 본다.

당시 클래식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대중음악을 무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유재하의 대학 친구들은 전부 클래식 전공자들 이었을텐데 주변에서

한마디씩 하지 않았을까 싶다.


6.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군대를 가게 된 이유에는 그의 연인 "김애란" 의 유학 때문이기도 하다.

김애란은 유재하의 모든 곡에 주인공 이었다. 그녀를 짝사랑하던 시절부터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는 모든 시기에 유재하는 자신의 심정을 가사로 적었다.

김애란이 없었다면 유재하의 곡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1집 앨범에 플룻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7. 봄여름가을겨울에서 유재하가 빠진 뒤, 그 자리를 채운 사람은 "빛과소금" 의 "박성식" 이었다.

그리고 그도 김현식에게 한 곡을 바치는데 "비처럼 음악처럼" 이 바로 그 곡이다.

유재하가 빠진 덕분에? 우리들은 명곡을 하나 더 건지게 된 걸지도...


8. 1집 녹음을 할 당시, 세션으로 학교 후배들과 지인들을 불렀는데 클래식 전공자들이라

대중가요 녹음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있었다. 걸리면 학교에서 짤리는거 아니냐며

걱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유재하가 그들을 잘 다독여 겨우겨우 녹음을 끝냈다.


9. 유재하 1집에 실리지 않은 유재하의 곡은 2곡 있는데 "이문세" 가 부른 "그대와 영원히" ,

그리고 "한영애" 가 부른 "비애" 란 곡이다.


10. 유재하의 사망일은 11월 1일 이다. 그리고 "신승훈" 은 그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의 기일과 같은 날에 데뷔를 한다. 1990년 11월 1일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날, 유재하를 아꼈던 김현식이 세상을 뜬다.

참 다사다난한 날이다.


11. 유재하의 사망 이유는 교통사고 였다.

그는 보조석에 앉아있었고, 운전은 술에 잔뜩 취했던 그의 친구가 했다.

중앙선을 넘어간 차가 마주오던 택시와 부딪쳐서 사고가 났다.

후에 유재하의 유족측에서 택시회사와 음주운전을 한 친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는데 택시회사는 무죄판결이 나왔고,

음주운전을 한 친구는 배상 판결이 나왔지만 음주운전을 옆에서 말리지 않은

유재하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고 하여 4400만원 정도 배상 하라고 나왔다.


12. 유재하는 사실 류 씨다.


13. 유재하의 아버지 "류일청" 은 아들의 이름으로 된 "유재하 음악장학회" 를 설립하였고

이 장학회과 주관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가 1989년 부터 열렸다.

유재하의 음악에 영감을 받았던 많은 후배 가수들이 참가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대회 출신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대표적으론 "유희열" , "조규찬" 등.


14. 영화 "살인의추억" 에서 범인이 범행전에 듣는 노래로 "우울한편지" 가 나온다.

물론 허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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